1. 퇴근 버튼을 누르는 순간, 세상이 조용해진다
퇴근 버튼을 누르는 순간, 세상이 갑자기 조용해진다.
누군가는 “이제 집 가야지” 하며 분주히 움직이지만,
나는 그 짧은 공백이 좋다.
일이 끝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숨이 트이고,
하루 종일 붙잡고 있던 긴장이 서서히 풀린다.
회사에 있을 땐 늘 누군가와 연결돼 있다.
메신저 알림, 상사의 목소리, 회의 일정.
하루 종일 ‘나’보다는 ‘직원’으로 살아야 한다.
그런데 퇴근하는 순간, 그 모든 게 잠시 멈춘다.
지하철역으로 향하는 길, 바람이 얼굴에 닿을 때,
그제야 진짜 내 세상이 다시 켜진다.
퇴근길에는 이상하게 생각이 많아진다.
오늘 실수한 일, 괜히 했던 말,
그리고 ‘이 일을 언제까지 해야 할까’ 같은 생각들.
낮에는 바빠서 생각할 틈이 없었는데,
퇴근길엔 그 모든 게 밀려온다.
근데 그게 꼭 나쁜 건 아니다.
그건 내 머릿속이 하루를 정리하는 방식이니까.
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들으면,
도시의 소음이 잠시 배경음처럼 바뀐다.
그때 나는 ‘직장인’이 아니라, 그냥 ‘나’로 돌아온다.
피곤한 하루 속에서도,
퇴근길만큼은 오롯이 내 시간처럼 느껴진다.
2. 지하철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이 조금 낯설다
지하철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을 가끔 본다.
그 얼굴은 피곤해 보이기도 하고,
어딘가 익숙하면서도 낯설다.
출근할 땐 보지 못했던 표정이다.
출근길의 나는 준비된 사람이고,
퇴근길의 나는 다 쏟아낸 사람이다.
가끔 창문 밖으로 스치는 불빛을 보면서
“오늘도 그냥 이렇게 지나가는구나”라는 생각이 든다.
지하철 안 사람들도 다 비슷한 표정이다.
무표정하지만, 그 속엔 각자의 하루가 담겨 있다.
누군가는 회의에 지쳤을 거고,
누군가는 혼자 밥 먹을 생각을 하고 있을 거고.
그 속에서 나도 그냥 또 한 사람으로 앉아 있다.
근데 그 순간이 묘하게 편하다.
아무도 나를 모르고, 아무도 나한테 말을 걸지 않는다.
그게 ‘퇴근길의 자유’다.
낮에는 해야 할 말이 많았는데,
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.
말 대신 음악, 불빛, 바람이 나 대신 말해준다.
창문에 비친 내 모습은 조금 흐릿하다.
그게 오히려 좋다.
지금의 나는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고,
조금 무너져 있어도 괜찮다.
이 시간엔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아도 되는
‘진짜 나’가 있다.
그게 퇴근길의 가장 조용한 위로다.
3. 집에 도착하기 전, 세상과 나 사이의 완충 구간
퇴근길은 이상하게 ‘사이의 시간’ 같다.
회사도 아니고, 집도 아니고,
딱 그 중간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느낌.
그래서인지 이 시간이 참 소중하다.
누군가는 이걸 귀찮은 이동시간이라 하지만,
나에겐 하루를 정리하는 완충 구간이다.
버스 창가에 앉아 멍하니 밖을 보면,
노을이 점점 사라지고 가로등이 켜진다.
그 변화가 매일 비슷하지만,
볼 때마다 마음이 다르게 느껴진다.
어떤 날은 안도감, 어떤 날은 외로움.
그게 다 ‘살아있다’는 신호 같아서
이 감정들이 싫지 않다.
퇴근길이 좋은 이유는,
그 시간만큼은 누구의 시간도 아닌 ‘내 시간’이기 때문이다.
회사에서는 회사의 사람이었고,
집에 가면 가족의 일원이지만,
이 순간만큼은 그냥 나 혼자다.
아무 역할도 없이 존재하는 시간.
그게 얼마나 드문 일인지 요즘 들어 점점 알게 된다.
집 앞에 도착하면 다시 현실로 돌아간다.
불을 켜고, 씻고, 내일을 준비한다.
하지만 그 전에, 버스 안에서 멍하니 보내는
그 몇십 분이 나를 버티게 한다.
하루의 끝이 조금은 덜 피곤하게 느껴지는 이유.
그건 아마,
퇴근길에만 존재하는 내 세상이 있어서일 거다.